나는 좋은 책들은 적어도 3번은 추천을 받아야 읽어볼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도 누군가로부터 여러번 추천을 받은 것 같은데, 읽어볼 생각을 한 것은 한달 전쯤 행사 수료식에 선물로 줄 책을 고르면서 였습니다.
제목이 해방일지라는 것이 왠지 좌익과 연결된 것 같아서 읽고 싶은 의욕이 들지 않았고, 저자가 '빨치산의 딸'이라는 책을 썼던 분이라는 얘기로 인해 한국사의 아픈 부분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또 감정소모가 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계속 저에게 누군가로부터의 추천이라는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3~4번 이 제목을 듣고 난 이후에야 책을 빌려서 읽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은 268페이지로 시간만 있다면 하루, 이틀이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소설인데 얼마나 많이 걸릴까라며 후다닥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몇 페이지를 읽고, 정말 내가 필력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은 문장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묘사와 인물과 이야기의 짜임새와 그 속에 숨겨진 듯한 의미 등이 세상의 많은 명작이라고 하는 책들을 보면서 이게 왜 노벨상을 받는 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이 소설은 감탄을 끊이지 않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내 수준에 딱 맞는 묘사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이 책의 이야기 라인과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과의 연결, 그 사람의 숨겨진 의도를 예리하게 살피는 작가의 시선 모두에서 내가 만약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게 하는 문장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너무 많은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저 사람인지, 저 사람은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가 조금 혼란스러워서 인물들을 정리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인물들을 엮고 있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이 책은 나에게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이 책은 과거의 일들이 회상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자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장례를 치르는 3일간의 얘기입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자식이 아버지를 추스르는 3일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소설은 얘기하고 있고, 그 얘기가 절실히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내가 곧 겪게 될 일이기에 더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책의 제목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해방일지는 아마도 아버지가 고난한 삶에서 해방되는 죽음을 뜻하는 것도 같습니다. 또는, 여러 사람들과의 얽혀있던 관계에서의 해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P44)
여기 있어보이는 말이 좋아보였습니다.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인간의 숙명과 역사의 진보라는 문구가 좋아보였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책 전반을 통해서 아버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연결들과 얘기들을 통해서 아버지라는 사람의 성격을 하나가 아닌 다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P181)
이 문장이 이 책을 쓰게 된 주된 모티프가 아니었을까를 짐작하면서 장례라는 절차가 가지는 진실한 의미가 이와 같이 않을까를 되세기게 됩니다. 이 문장은 내가 사람을 얼마나 단편적으로 일반화하여 인식하고 있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몇일전에 읽은 책의 <범주화와 일반화>라는 말이 그렇게 와 닿았던 것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저 단순한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해는 가장 가까운 가족마저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그래서 이 책에서 나타나는 내가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찾아가는 여정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알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보여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또 얼마나 다각적인 인간일까? 나 자신의 탐구라는 주제가 내 독서의 근간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한걸음도 못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책이 들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P248~249)
이 책에서 더욱 좋았던 부분인 작가의 사람에 대한 이해와 시각이었습니다. 작가가 아주 사소한 수치의 변화와 말의 의미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줄 때, 이 분은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성찰을 하고 있는지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감탄을 하게 합니다.
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 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P85)
자신의 앞날을 막았던 친척 어르신의 조문을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 있을 사람의 눈빛을 저렇게 표현하는 것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P138)
아버지의 말을 통해서 사람에 대한 위의 문장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지는 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책은 꼭 소장하고 한번씩 기억날 때마다 다시 읽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짧은 듯했지만, 시간이 많이 들여서 읽어야 하는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등장인물 : 주인공(고아리, 미모 하의 상), 아버지 고상욱, 어머니 ???, 방물장수(이와 마늘반접), 황사장(장례식장 공동사장, 사촌오빠의 동창이자 아버지 정치적 동료, 빨치산 황길수의 아들), 박동식(아버지를 삼촌으로 모신 피를 나눈 것과 진배없는 동생), 최약방(지리산에 죽은 압 하나뿐인 형, 한약으로 불임치료), 작은아버지(고상호, 못배우고 잘못된 정보 전달하는 형을 평생의 원수로 생각, 여순사건), 할머니(허리가 기역자로 꺾여서 허리에 묶은 채~~), 박한우(중앙국민학교 35회 졸업생, 군대제대 후 교련선생,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하염엾다. 자기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이), 시계방 옆 실비집 할머니(하동댁, 궁둥이 토닥토닥), 큰집 길수오빠(육사 신원조회 불합격, 위암말기), 반내골 사촌언니들(한언니는 반내골, 두언니는 타지), 떡집언니(어머니 동료의 딸, 더 딸같은), 한씨 (한씨 사위 교통사고 처리), 장영자(장씨집 맏이, 암내, 수술), 큰언니 딸 경희(나이많은 조카, 여호와의 증인), 큰집 막내 숙자(말기암환자와 결혼, 유복자 딸), 지팡이 휘두르던 술꾼 노인(형님은 죽고, 아버지는 살아서 화남), 오거리 슈퍼 노랑머리 여자아이(베트남 혼혈, 아버지 담배친구...), 손가락 화상입은 친구, 13살에 입산한 소년 빨치산, 장성 만석꾼 집안의 장손이었던 비전향 장기수(잘생김, 노동을 무서워해서 월북), 윤학수(주인공의 대학동문, 여순사건 실태조사, 아버지가 학수라고 아들처럼 받아들임), 아버지 첫번째 마누라 동생, 어머니의 옛시동생, 윤재(어머니의 전남편), 김상옥(카톨릭농민회 초창기 멤버, 천렵, 아저씨 아닌데 시살윈데...이삿짐), 아버지가 살린 군수, 소선생(아버지와 어머니의 은사), 소선생의 장남(빚을 지고 삶, 서울서 구례 왕복 8시간), 대학 8년을 만난 선배(결혼 직전 파혼), 노란머리 혼혈의 엄마(장례식장에서 잠시 잠듦.)
사회주의보다 더 강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봐도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을 뇌세포에 각인했다. (P11)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섦게 울던 어머니는 눈 촉촉이 젖은 황사장을 그 이상의 촉촉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P21)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 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P23)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P27)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P44)
"상욱아. 너 하염엾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P49)
항꾼에, 올라네, 말 사이의 짧은 침묵이 마음에 얹혔다. (P50)
아버지는 난생 처음, 자식에게 돈을 요구했다. 고작 삼만원을. 자식이든 남이든 절대 신세 지지 않는다는 평생의 원칙을 깨뜨리게 만든 것이 고작 삼만원. 이것이 늙은 혁명가의 비루한 현실인 것이다. (P54)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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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 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P85)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P110)
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 아무도 보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그날 작은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으랴. (P130~131)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P138)
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P147)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P181)
사램이 덤덤하게 죽음을 맞이하기가 쉬운 줄 아냐! 총소리만 나먼 꿩 새끼마냥 대가리부텀 바우 밑으로 디미는사램도 있었어야, ~~~ (P184)
내 말에는 칼이 숨이 있다. 그런 말을 나는 어디서 배웠을까?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사이 나는 말 속의 칼을 갈며 견뎌냈는지도 모르겠다. (P192)
술꾼은 시간을 뛰어넘은 자, 아니 어쩌면 어느 시간에 못 박혀 끊임없이 그 시간으로 회귀하는 자일지 모른다. 작은 아버지가 그랬다. (P193)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끈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기 질긴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P197)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P198)
시집 안 간 딸자식에게 언니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비수가 꽂힐 때 알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자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 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217)
학수는 노련한 사람이다. ~~~ 학수는 지금 옛 추억을 상기하는 척, 저 혼자 잘난 나에게 엿을 먹이고 있는 것이다. 너는 대체 어떤 딸이었냐고. (P224)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P225)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마음은......그 어느 때보다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P231)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P248~249)
옛날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한 어깨에 두 짐을 지고 살아왔구나. 작은 아버지나 나는 유약해서, 혹은 세상이 좋아져서 한 어깨에 두 짐 못 지는 거라고, 스스로 나자빠진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P260)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 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갱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더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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