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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책읽고 내 생각 적기)

호모 저스티스 (김만권, 2016.10.10) 정의의 계보학

by 무우우우니 2023. 9. 25.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2014년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한국에서 엄청난 히트를 쳤었다. 그 때, 이 책의 흥행의 성공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나왔었는데,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의견이 "대한민국 사회에 정의가 부재하다는 인식으로 인해서 정의에 대한 담론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때도 책을 읽기는 했지만,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번의 "호모 저스티스"를 읽으면서 그 때의 내용을 살펴보고 싶어서 책을 찾아보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기가 어렵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 계속 "정의라는 것이 뭐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예전에도 정의를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동의할 수 있는 정의라는 것은 만들어지기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개개인 각자는 자신만의 경험에 의해서 자기만의 정의의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생각을 몇가지 단순한 설명으로 명료화시키는 것에 놀랐다. 처음은 플라톤의 "국가론"으로 정의를 시작한다. 우리집에도 있지만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인데, 그 내용 중에서 도덕을 힘과 도덕의 대립이라는 구조를 찾아내는 데 감탄했다. 내게는 도덕이 지금까지 생각하는 정의였는데, 고대 사회는 도덕보다는 힘으로써 정의를 대신해 왔다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도덕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으로써 도덕의 기본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도덕을 무시하는 독재자가 나타나는 이유는 "기게스의 반지"처럼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질 때 나타난다는 내용도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정의라는 것은 평등한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내용은 공정한 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스스로 충분한 자립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의는 내가 쟁취하는 것이지 타인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내 정의를 찾고, 관계 맺을 준비가 되지 않으면 지배당하게 되고, 지배당하는 관계에서 정의는 있을 수 없다.

이런 논리에서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상태에서도 약자는 지배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나치즘과 전체주의가 대두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 보수주의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노력한 만큼 받을 수 있도록 사회는 만들어져 있고, 내가 못사는 이유를 사회구조에서 찾기보다는 나의 노력의 부재에서 찾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과연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가 계속 승자에게 유리하게 바뀌어간다면 개인의 성공이 개인의 노력에만 달렸다고 주장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로운 제도가 만든다는 마지막 문단과 에필로그의 말은 우리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눈을 들어서 인식하고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회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듯 하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가 "너의 무지를 인정하라."라는 말과 동일하다고 했듯이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무관심은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정치체계가 자리잡도록 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돌아갈 분배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를 위한 상호간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갈고 닦아온 언어와 논리와 이성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다.

항상 느끼지만, 책의 일부분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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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팡세 : 힘이 동반되지 않은 정의는 권력 없는 것이고, 정의가 동반되지 않은 힘은 전제적인 것이다. 힘이 없는 정의는 하나의 모순인데 언제나 사악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정의 없는 힘은 비난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와 힘을 합해야 하고 이를 위해 정의로운 것을 강하게 혹은 강한 것을 정의롭게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의는 논란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반면 힘은 쉽사리 인정받고 논란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의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데 힘이 정의를 뒤집고 정의를 정의롭지 아낳은 것이라 말하며 힘을 위한 정의를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로운 것을 강하게 만들 수 없었던 우리는 강한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만들어왔다. (P11~12)

정의의 실체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정의를 '힘과 도덕의 역학관계에 있는 것', 즉 힘과 도덕의 틀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실제 우리가 마주하는 정의의 실체가 무엇이든, 그것은 힘과 도덕이 서로 대결을 벌이며 형성되어온 유동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 힘과 도덕의 틈 사이로 들어가볼 수 있는 방법 : 계보학 (P15)

정치의 목적은 바로 정의가 무엇인지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정교한 언어가 생긴 이유도 바로 이 정의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다. ~~~ 호모 유스티치아 (정의의 인간) => 호모 저스티스 (P26)

올바름이란 권력관계가 서로 평등할 때나 질문할 수 있음도 서로가 다 아는 사실이오. ~~~ 신도 인간도 아는 필연의 법칙은 신도 인간도 지배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라도 지배한다는 것이오.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질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갑을관계가 된다> (P35)

글라우콘 : 인간 본성이 옳은 일을 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진정한 정의란 자기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두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실천하는 이유는 단지 제약 없이 나쁜 짓을 저지를 충분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 기게스의 반지 예 (P94)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히틀러와 스탈린의 힘은 군대가 아니라 누구도 제한할 수 없었던 비밀경찰에 있었고.....극단적인 힘은 반드시 부패하고, 그 극단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근원이 "은밀함"에 있다는 글라우콘의 주장이 2,5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확실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P98)

한스 켈젠 "민주주의의 방어" : 민주주의자는 심지어 민주주의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에조차 관용해야 한다. 민주주의자는 배가 침몰하더라도 자신이 든 깃발을 지켜야 한다." 민주주의는 '민주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사례는 그 민주성의 핵심이 '개방성'에 있다고 말한다. (P107)

절망하고 등 돌리는 일이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변화는 이에 맞서 제도적 해결책을 모색할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P117)

역사상 거의 대다수의 정체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단 하나의 예외가 바로 민주정인데, 약자들이 다수를 형성해 강자들을제약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P127)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바로 "너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의미나 다름없다. 그래야만 앎에 대한 탐구가 지속될 수 있다. (P147)

앎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혜롭다는 것. 실천하지 않는 앎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 그리고 그 앎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때로 목숨도 내걸어야 한다는 것. 소크라테스의 이런 이야기는 이익과 힘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도덕적 정의를 실천하는 일은 그 시작부터 진정 위험한 것임을 들려주고 있다.  (P155)

플라톤이 밝히고 있듯 진리는 '올바른 것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속성은 '영원성'이다. 진리는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으로 불변하며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이란 소위 진리를 관조하는 일이다.  (P179)

플라톤 : 진정한 지도자는 고난 속에서도 언제나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용기 있는 자들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 진리의 언덕에 안주하지 않고 때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그 혼란의 동굴로 돌아가는 일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피하지 말아야 할 임무다.  (P198)

존 롤스 :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  (P199)

플라톤 : 현명한 사람의 신은 법이요. 어리석은 자의 신은 쾌락이다.  (P200)

아리스토텔레스 : 정의는 진리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목적이다.  (P207)

동등한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관계 또한 평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정치적 정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들이 '통치'와 '피통치'에 있어 동등한 몫을 가질 때 실현 가능한 것이다.  (P217)

전 온전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정치적 권리의 행사는 그 일부라고 생각해요. 정치적 권리를 온전히 행사할 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진정한 일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동체 속에서 제 삶을 온전히 행복하게 누리고 싶습니다.  (P232)

시민권과 인권이 충돌할 때 생겨나는 정의의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문헌 :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P237) 

홉스는 당시 일정한 영토 내에서 종교적 해석의 다원성이 지배하는 전쟁상태, 즉 제3의 중재자 없이 도덕적 가치가 그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다원주의 상태를 '자연상태'라고 불렀다. 종교전쟁이 보여주었듯이 이런 다양한 해석을 중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제3자가 없는 자연상태는 '만인이 만인을 향해 투쟁'하는 전쟁상태나 다름없었고, 홉스는 이런 상황을 종식시키고자 가치해석의 권위를 '리바이어던'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P239)

오늘날의 시민권은 ㅅ히민적 자유와 정치참여, 나아가 복지에 대한 권리까지 보장한다는 점에서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안전망이라 할 수 있다. ~~~ 홉스는 이런 정의를 누리는 사람들이 타인이 겪는 재난에 대해 무심한 감정을 잔혹함이라 부른다. (P261)

이런 차별과 혐오의 논리는 정부만이 아니라 우리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인권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다. ~~~ 이성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P295)

사회적 총샌산의 극대화를 위해 분배를 무시해도 좋다는 발상, 사회적 공익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해도 좋다는 발상은 최대행복에 지나친 방점을 찍는 동안 공리주의 내에서 생겨난 체제 순응적 발상의 결정체였다. (P323)

정의로운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올바른 분배의 형식은 재분배가 아니라 최초분배다. ~~~ 롤스는 애초부터 적정 소득이 분배될 수 있는 사회적 기본제도가 갖추어진 민주적 정체를 재산소유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P334)

사회적 갈등은 생산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분배에서 시작된다. 결국 정의는 "얼마만큼이 나의 몫인가?"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P349)

롤스 : 주요 제도는 인간의 인생 전망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소망까지 결정한다. (P232)

롤스가 가정하듯 정의로운 제도가 정의로운 인간을 만든다. 차별과 협오에 반대하는 제도적 장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차별과 협오를 형성하는 구조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데 있다. 평등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만드는 것이다. "평등을 만드는 일을 사회기본구조가 행하게 하라." 이것이 차별과 혐오에 맞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정의의 자세다. (P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