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1976, 1996, 2020) -에리히 포름-
소유냐 존재냐를 대학 때 읽고 난 이후 다시 읽고, 독서모임까지 하게 되었다. 항상 느끼듯이 이 책을 내가 읽었었나?라는 의문이 계속적으로 마음에 떠오른다. 이번에는 에리히 포름이라는 작가의 사회학적 배경, 심리학적 배경에서 이 책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읽었던 것 같다.
1976년에 쓰인 이 책이 2024년 현재에 읽어도 사람들의 존재양식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에서 지금도 유효한 문제의식과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 놀랍다. 50년 동안 사람들은 이 책을 읽었고,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 책 이전에 읽었던 '권력과 진보'에서 나타나는 진보를 위한 사회적 협력이라는 문제의식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당시의 사회에서도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빈부격차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경제체제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문제점은 인식되고 논의 되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서 개인은 사회와의 연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진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에리히 포름은 사회적 기준과 규범의 변화를 통해서 개인의 존재양식의 지향점을 바꿔야 한다는 방향으로 문제해결책을 제시한다고 이해했다.
소유적 존재양식과 존재적 존재양식의 다양한 비교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는 모든 개별 사건에 대해서 존재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소유와 존재가 개인에게 동일하게 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우리의 인식을 존재를 중시하도록 이동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삶과 행동과 태도를 소유와 존재라는 실존방법에 비추어서 다시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사회에 영향을 받고, 나의 기준이 소유에 맞춰져 있고,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해서 나를 인식하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서 나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는 모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의 총합'이라는 명제는 참인가? 내게는 내가 가진 것 이외의 나를 나타낼 수 있는 불멸의 무엇인가가 있는가?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인식은 나의 소유인가? 물질의 소유만이 소유로 생각할 것인가? 진정으로 나로써 존재하면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등등의 끊임없는 질문이 떠오른다.
여러가지 생활습관에서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나의 소유적인 생존양식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사례를 하나 발견했었다. 독서토론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하면서, 사회문제의 인식과 그에 따른 실천적 노력에 대한 얘기들이 나왔을 때, 현 상황에 대한 비판에는 수긍할 수 있었지만, 내가 현 상황에서 나가서 시위를 한다던지, 다른 사회적 운동을 진행할 생각은 없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 앞에서 했고, 그 때 내 마음에 떠올랐던 첫번째 생각은 "이런 나의 태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쓴다. 나라는 존재를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일치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월감과 열등감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삶인 것이다.
온전히 나로써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모습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타인과의 비교로 인한 열등감과 우월감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있고, 나는 나의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 대해서 관대하고 수용적이지 못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수용적으로 대할 수 없다.
결국, 나로 다시 되돌아오면서 끝없이 소유의 존재양식에 얽매어 있는 것 같다. 나의 경계를 넓히는 것, 주변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 변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소유욕과 평화는 서로 배척관계에 있다. ~~~ 18세기에 근본적 변혁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극단적 쾌락주의와 무제한적 이기주의가 경제행위를 주도하는 원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P22)
인간의 "마음" 안에서의 변화도 과감한 경제적,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 외부의 변화가 인간 자체에 변화할 기회를 주며,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용기와 상상력을 부여할 것이다. (P27)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는 사상이다. (P34)
모든 현대인이 소유와 탐욕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사회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기인한다. (P39)
생명이 있는 유기체는 생성을 겪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변화하는 한에서만 실존할 수 있다. (P47)
앎은 표면을 뿌리까지 뚫고 들어가서, 근원에 이르러 적나라한 현실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뚫고 들어가서 비판적이고 능동적으로 진실을 향해 가급적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P66)
이런 종류의 앎의 관건은 내가 얼마나 나의 자아를 버릴 수 있는가, 과연 얼마만큼 상대방을 본연의 존재로 보고 그의 내적 능력의 구조를 인식할 수 있는지, 그를 실제로 고유의 개체인 동시에 전 인류의 부분으로 볼 수 있는가하는 것에 달려있다. (P72)
안식일의 역할 ~~~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재수립한다는 의미에서의 평온함을 뜻한다. 그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짓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그런 평온함 말이다. (P81)
안식일에만은 ~~~ 소유하지 않은 듯, 존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시간이 극복되고 오로지 존재가 지배하는 날이다. (P82)
에크하르트 :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를 받치고 있는 근본이다. (P101)
19세기 이래 들어선 소유상황의 변천이다. ~~~ 옛 사람들은 이미 소유한 물건은 소중히 아끼며 가능한 한 활용했다. ~~~ 그리고 간직하기 위해서 사들였다. (P108)
무수한 사물, 심지어는 감정, 하다못해 건강이나 질병까지도 우리는 소유물로 체험한다. (P111)
1960대 말 이래 ~~~ 대부분은 " ....로부터의 자유"를 구가하기는 했지만, "....를 향한 자유"로의 도약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P112)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은 객체를 소유하고 있음을 빌어서 나의 자아를 정의하고 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주체이다. (P116)
소유적 존재양식의 인간은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우월하다는 데에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에서, 그리고 결국 정복하고 약탈하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P120)
우리 사회의 권위적 구조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그만큼 우리도 소유적 실존양식 속에서 살게 된다는 점이다. (P176)
존재적 실존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있다. (P184)
방향정립의 틀 없이 이룩된 문화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 자신이 지닌 세계관이 당사자에게는 단지 자명하게 여겨질 뿐이라는 점을 우리는 쉽게 입증해 보일 수 있다. 그의 눈에는 바로 그 세계관만이 유일무이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P197)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역사는 기독교에의 귀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복과 허욕과 탐욕의 역사이다. (P203)
"우리는 기계를 신성으로 추대했고, 그 신성에 봉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신과 같아졌다"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기대어 스스로 전능하다고 착각한다는 사실이다. (P219)
연대감과 삶에 대한 경외감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의 실현이다. (P234)
근본적인 인간정신의 변화가 경제적 파국에 대처하는 유일한 대안임을 인식한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P235)
"소비자의 욕망은 생산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P256)
최소 수입 보장제도는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 (P273)
과연 우리에게는 구원받을 합당한 기회가 있을까? ~~~ 이득볼 확률이 단 2퍼센트밖에 없는데 누가 자신의 재산을 걸 것이며, 별 승산 없는 장사에 누가 거액을 투자할 것인가? (P281)
서구사회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학, 자연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 인간적 연대감과 협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P282)
문제는 다만 방향전환인 것이다. 새로운 방향으로 일단 내딛기만 하면 다음 발걸음도 저절로 뒤따를 것이며, 방향이 옳기만 하다면 그 발걸음은 내디딜 때마다 엄청난 의미를 가질 것이다.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