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파랑(2020) -천선란-
"단연코 올해 읽은 소설책 중에서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다.
이 책의 앞에 읽었던 '클라라와 태양'이라는 소설이 이 책을 참고로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티브나 주인공, 휴머노이들의 생각방식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학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것 때문에 어떤 과학적인 사항들이 들어가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읽게 되었는데, 오히려 소설의 드라마와 인간 심리의 섬세한 묘사에서 감동받았다.
이야기의 구조도 충격적이었다. 첫 시작 장면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누군가가 어딘가로부터 떨어지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리지?라는 의문의 해소하기 위한 집중부터가 이 소설에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세심하고 섬세한 묘사는 소설 곳곳에서 느껴진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저자에게 정말 부러움을 많이 느끼면서 한장한장 넘어가면서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궁금한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낌면서 읽게 되었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 한사람의 인생을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이 책은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5~6명의 인생을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 브로콜리, 이름이 나오지 않는 소방관, 김보경, 우은혜, 우연재, 지수, 민주, 복희, 투데이, 서진. 모든 인물들이 살아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 소설은 항상 숨겨진 의미를 찾는 수수께끼 또는 숨박꼭질이었는데, 이 책은 읽는 그대로 그 사람들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공감의 시간이었다.
좋은 문장들도 너무 많아서, 꼭 기억하고 싶은 문장만 적는데도 여러 시간이 필요했다. 이 책은 다음에 꼭 독서토론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감정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더 명료화해보고 싶은 것이다.
내가 언제나가 글을 쓰게 된다면 이렇게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엄청 많이 하면서 읽어다.
교훈적이고, 감정적이고,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가득하다. 소설이면서, 일기같고, 질문서 같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브로콜리 같은 상담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과 내가 누군가에게 브로콜리같은 상담자가 되어줄 수는 없을까라는 두가지 마음이 남는다.
콜리는 이상한 일을 겪었다. 기수방 시계는 고장나지 않았지만 시간은 더 느리게 흘러갔다. (P15)
구름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뭉쳐 있었으며 저마다 두께감이 달랐다. 하늘이 평면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였다. (P21)
갈기가 물처럼 흐르고, 기쁨의 떨림이 몸을 감쌌다. 투데이의 빠른 박동을 콜리는 오롯이 절달받고 있었다. 투데이, 행복한가요? 그럼 저도 행복한 거예요. (P27)
투데이의 등에 앉아 달릴 때마다 콜리는 숨을 쉬었고, 호흡이 생명의 특권이라면 콜리는 그 순간만큼은 생명이었으며, 생명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콜리는 살아 있었다. (P28)
콜리는 자신의 최후를 생각해도 이렇다 할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되도록 오랫동안 하늘만 보고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쉬움과 형태가 같다고는 깨닫지 못한 채로 말이다. (P32)
연재는 곧 스스로 안쓰러워 그만두었다. 오지랖 부리며 생각하지 말자. 짜증나면 짜증 나는 거지 초기 비용을 자신이 왜 따지고 있나 싶었다. (P44)
"3%도 살았는데 80%는 왜 못 살아. 당신 왜 이러고 있어." ~~~ 3%의 생존율로 살아남았던 보경은 이제 300%의 삶을 짊어지게 된 셈이었다. (P85)
제 딸이 다 망가진 휴머노이드를 가지고 왔다. 어쩐지 눈은 뜨고 있으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빼앗긴 적 없는데 빼안긴 기분이었고 버려진 적 없으나 버려진 기분이었다. 휴머노이드를 보면 그랬다. (P91)
사람은 이따금씩 강렬하게 무언가에 끌렸다. 그게 사람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음악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 강렬한 끌림 앞에서는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P93)
은혜가 열여섯이 되기 한참 전인 여덟 살에 아빠가 세상을 떠났고 보경은 무너져가던 가게를 사 삶의 줄므을 펴기 바빴다. (P96)
말의 매력에 사로잡힌 날이었다. 1초가 100프레임처럼 펼쳐졌다. 말이 달릴 때 요동치던 갈기와 꿈틀거리던 근육, 바람에 흩날리던 이팝나무의 백색 꽃잎, 말을 향해 내던지던 사람들의 함성, 그 모든 것이 인상파의 그림처럼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P99)
연재는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 다르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을 수긍하고 몸을 맞추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 그러니 연재에게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수업이 마치자마자 온 힘을 다해 뛰어가는 것. (P113)
선배는 이미 너무 많은 아이들을 가슴에 품었고 그 아이들만으로도 슬퍼할 앞날이 가득했다. (P133)
달리지 못하는 말은 말이 아니다. 공부하지 않는 학생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복희도 듣고 자랐지만 그 안에 내포된 박탈의 의미는 천지 차이였다. (P134)
얼룩말의 집단자살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복희는 관리인의 말을 평범한 농담쯤으로 받았을 것이다. (P159)
요즘 애들이야말로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 관계는 깔끔하게 쳐내는 기지를 잘 발휘하지 않던가. (P161)
"너무 빠르니까요. 조금 느려도 되지 않을까요?" (P164)
보경이 밤새 죽인다고 죽인 숨으로 울었던 새벽에 문 앞을 한참 서성이다 조용히 휠체어를 끌고 돌아간 은혜를 보경은 몰랐다. (P173)
주원의 배려는 남들과 다르다. 주원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인도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춰 은혜를 기다렸다. 그 행동에는 은혜를 배려해야겠다는 선의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뿐이었다. (P180)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져 감각이 고장 났다. ~~~ 그렇게 해서라도,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맞춰가야 맞는 것일까? (P184)
은혜 : 일단은 열심히 할꺼야. ~~~ 뭐든! 밥 먹는 거든, 약 먹는 거든, 운동하는 거든, 공부하는 거든.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건 일단 열심히 하고 있을래. 그렇게 있다 보면 무슨 일이든 방법이 생기지 않겠어? (P187)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림움을 이겨." (P205)
대화를 많이 할수록 보경에게 깔려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표피같이 얇게 한 꺼풀씩 벗겨졌다. (P206)
은혜의 눈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투데이의 운명과 세상의 무책임한 몰이해에 대한 분노가 한계치를 넘은 듯했다. (P220)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P221)
투데이의 좁은 마방 안에 세상을 불어넣어줬던 은혜가 아니었던가. ~~~ 투데이도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다. 은혜가 들려주는 세상의 이야기를, 은혜가 안겨줬던 애정의 온도를. (P239)
기술의 발달과 멸망의 속도가 같다. ~~~ 사라져가고 학대받는 동물들에게 관심을 나눠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251)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들을 수 있는 귀와 끄덕일 수 있는 고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P271)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P205~6)
지수는 외로운 적이 없어 외로움을 타지 않는 성격이라 스스로 말했지만 연재가 보기에는 늘 외롭게 있어 외롭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P291)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P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