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책읽고 내 생각 적기)

개념-뿌리들(2012) -이정우-

무우우우니 2024. 5. 8. 14:03

올해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심력을 소모하게 하는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고, 왠지 내가 가는 방향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때, 철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철학의 정의를 지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한다는 글귀를 읽지만, 사실 지식에 대한 사랑으로 철학을 이해하기 보다는 인생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얻을 수 있는 학문으로 철학을 떠올리는 것 같다.

이 책을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서 제목을 알게되고,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들었다. 나름 사유라는 것을 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모르는 지식도 많이 알게 되고, 뭔가를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찾아들어가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풀이가 좋았다.

3주 정도가 걸려서 읽은 것 같은데, 2시간 40여페이지를 읽으면 잠이 온다. 뇌를 많이 굴렸다는 생각도 들고, 피곤해져서 쉬게 된다. 끝날 때쯤에서야 하루에 100페이지를 조금 넘겨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철학의 개념어들에 대한 1년과정의 강의를 모아서 책으로 낸 것으로 이해된다. 한 강의가 몇시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정도로 많은 얘기를 하려면 강의시간이 하루에 4시간은 넘어야 할 것 같다. 1부의 형이상학, 존재론에서 2부의 현실철학, 인식론 등의 짜임새로 한 단원, 한 단원에 다시 읽고 이해해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다.

처음에는 용어해설집이라고 들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철학사와 연결되고, 개념들의 기원과 쓰이는 용법의 차이점에 대해서 미세하고 예민하게 구분해서 설명을 따라가기 위해서 신경을 집중하고 읽어야 한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한자로 연결되는 어원들의 해석에서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는 착각이 들어서 좋았다. 마침내 한번을 다 읽었지만, 유튜브에서 이 분의 강의를 찾아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철학에 대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던 갈증, 불만족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왜 가끔씩 철학책을 기웃거리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존재론과 형이상학과 연결이 되는지, 그것을 철학자들은 어떻게 사유를 통해 질문에 대한 근본으로 찾아들어갔는지 조금은 맛볼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전반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 떠오르는 문구는 서구 사회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어울림이라는 말이었는데, 철학에서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는 개념들의 사용을 비교분석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용어들 전체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 다른 철학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알게되었다는 것만으로 꽤 만족스럽다.

이 책은 소유하고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결국 개념들을 명료화하고 종합한 행위입니다. ~~~ 근본 개념들의 명료화 및 창조적 종합의 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4)

이 책을 보고, 다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전에 읽었던 남경태 선생님의 개념어 사전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뭔가 독서력이 조금 더 올라간 것 같다.

 


본질적인 것,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 순수한 열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뒷전이고, 온통 돈이 되는 것, 빨리 되는 것, 얄팍한 감성으로 해결되는 것, "끼"로 감당되는 것들만이 사회를 뒤흔들면서 돌아다닌다. (P7)

개념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히 물리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유할 수 있는 문화적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개념/의미야말로 우리를 물리세계만이 아니라 문화세계에서도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죠. (P18)

개념과 사물 또는 개념과 경험은 서로서로 역설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념은 경험들을 포괄하지만, 또한 경험은 개념들을 포괄합니다. ~~~ 어떤 개념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개념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다른 개념들을 불러옵니다. (P19)

철학이란 무엇인가? 결국 개념들을 명료화하고 종합한 행위입니다. ~~~ 근본 개념들의 명료화 및 창조적 종합의 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4)

우리의 경험 자체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개념들로는 이런 현상들이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 개념들을 재규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P26)

Arche : 근원, 원리. "원"이라는 말의 원래 형태를 보면, 높은 산이 있고 거기서 물이 졸졸졸 흘러내리는 모양입니다. ~~~ 물길을 쭉 따라 올라가 그 시원을 찾아간다는 함축을 띠고 있습니다. 리는 땅에 나 있는 구획들, 결들이 "리"(P40)

인간을 포함하는 궁극의 존재였던 퓌지스는 이제 인간이 가공해서 실용적으로 써먹는 '자원'이 된 것이죠. ~~~ 서구 특유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특수한 사상이 근대이후 세계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P97)

고중세 철학 : 사실상 애초부터 객관과 주관의 구분이란 없었던 것입니다. 객관전체의 일부가 우리의 주관. // 근대 철학적 구도 : 객관과 주관을 양분하고 주관을 주인공으로, 객관을 그 주체가 요리하는 대일상으로, 일종의 재료로 생각. (P103)

기계론은 방금 이야기했듯이 데카르트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 기계론은 세계의 법칙 하나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니까요. (P120)

운명이라는 개념은 뉘앙스가 조금 어두워요. 인간이 겪어야 하는, 인간이 당해야 하는, 인간이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받아들여야 하는 명, 그런 것이 운명이에요. 도저히 납득은 가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어떤 길으 걸어가야 할 떄, 사람들은 "그래, 이게 내 운명인가 보다"하고 말이죠. ~~~ 모든 것이 정해진 바에 따라서 일어난다는 생각이죠. (P131)

우발성 = contingence : 운명이라는 말에는 이렇게 결정론적 뉘앙스와 탈-결정론적 뉘앙스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P147)

길을 아는 것은 필연을 아는 것이죠. 또는 모이라로서의 운명을 아는 것입니다. ~~~ 그러나 실제 길을 걷는 것은 시간 속에서 걸어가는 것이고, 따라서 가보지 ㅇ낳고서 인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P148)

파르메니데스 : 존재와 무는 절대 모순이죠. ~~~ 어떤 형태로든 무가 존재할 경우에만 불연속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죠. 무는 없기에 불연속 역시 불가능합니다. (P174)

포스트 모더니즘 ~~~ 자크 데리다 : 형이상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서구의 사유들이 어떤 문제점을 띠고 있는지를 낱낱이 해체함으로써 철학사에 거대한 분기점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등)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죠. (P199)

궁극적 실재를 못박고 그로부터 세계를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복수성과 그것들 사이의 구체적 차이, 관계를 밝히는 것이 오늘날의 존재론의 모습입니다. (P201)

분열과 무관심의 사회는 결국 대중매체와 대중문화에 의해 지배받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차이라든가 복수성 같은 가치들이 어찌 보면 현실세계를 실제 지배하는 거대한 힘들을 더 강화시켜 줄 수도 있다는 겁니다. (P248)

각 존재의 고유한 본성이 존중되면서도 그 본서이 너무 고착화되어 억압이 되면 안 되죠. 각 사물에는 각자의 '도'가 있지만, 그 '도'는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리고 자율적으로 유연하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죠. (P250)

사물들이 즉자적으로 완벽하게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곳에 운동은 없습니다. 자기동일성이 무너지고 타자와의 섞임이 가능해야지 운동이 가능한 것이죠. (P270)

철학이라는 담론이 갈수록 연성화된다고 할까요, 본래의 깊이가 외면당하고 자꾸 일종의 문화평론 비슷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P293)

공간이라는 것은 추상화된 어떤 것이지만 장소라고 하는 것은 사물들이 이미 있는 그 상황에서의 위치들과 관계들인 것이죠. (P313)

서구 전통 사유의 대전제는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이 테제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P317)

서구의 고중세 철학이 존재론적 구도에서 이루어지고 인식론은 그 부속물의 역할을 했다면, 근대 철학은 대체적으로 인식론적 구도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 철학은 이간이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P320)

인식이란 감성(의 틀)을 통해 받아들여진 인식질료를 인간의 오성(의 틀)이 구성해서 보편성과 필연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 우리 오감이 이 세계와 접촉해서 인식질료를 만들어내죠. 현대식으로 말하면 데이터를 얻어냅니다. ~~~ 칸트는 이성을 세가지로, 즉 감성, 오성, 사변이성으로 나눕니다. (P322)

주체가 경험을 구성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주체를 변화시키는 겁니다. (P329)

목적의 범주는 상태-경향-열정으로 구성됩니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을 때 그 종합으로서 열정이 성립합니다. (P333)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어떤 것을 배우는 데 있다기보다는 늘 사용하면서도 분명하게 음미해 보지 못한 의미들, 캐물어 들어가면 의외로 깊은 함축이 있는 개념들을 잘 음미해 보는 것이죠. (P342)

사물들을 이렇게 이성을 통해서 파악하려는 태도를 우리는 합리주의라 부릅니다. (P349)

철학은 인류가 이룩한 다양한 지식들을 종합하되 (이 종합의 행위는 반드시 메타적 비판을 동반합니다.),  그 종합을 통해 결국 인간의 자기 이해 및 삶의 가치를 사유하고자 합니다. 때문에 철학은 상식과도 과학과도 다른 종류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P352)

위대한 사유들은 상상력과 직관을 통해서 실증성의 테두리를 넘어 비상합니다. 다만 끈 떨어진 연이어서는 안되겠죠. 경험/현실과 끈을 잇고 있어야 합니다. (P365)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네가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라라는 뜻이에요. (P384)

철학사 없는 철학은 얄팍하고 철학 없는 철학사는 고루한 것입니다. (P388)

결국 살아 있다는 것은 운동을 통해 타자들과 끝없이 접촉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한 주체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겪음으로써 그 결과 변양되어 가는 것이죠. 이것이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는 말의 가장 원초적인 의미입니다. '산다'는 것은 관계, 겪음, 변양을 뜻하는 것입니다. (P432)

삶이란 이렇게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양면을 띠고 있죠.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들과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들. 객체성과 주체성. 이 두 힘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이 삶입니다. (P432)

중용은 우선 시야의 넓이를 전제합니다. 넓게 보아야 거기에서 진정한 중용을 취할 수가 있죠. 애초에 시야가 편협하다면, 그 편협한 시야 내에서 취한 중용은 사실상 치우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유의 넓이, 삶의, 넒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P504)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윤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세계질서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는 것입니다. (P515)

도덕이 옳음과 그름의 문제라면 윤리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526)

상대주의적인 교양이 필요합니다. 개인, 집단, 문화, 시대 등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윤리의 기초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깨닫는 것이 모든 윤리의 출발점인 것이죠. 그러나 귀결점은 아닙니다. (P532)

파라 독스의 차원은 대립하는 통념들이 불이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차원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의미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동시에 긍정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노자의 세계에서 도라는 것은 바로 이 역설(파라-독사)과 농-상스의 성격을 띱니다. 그래서 도를 특정한 도로서 규정할 때 이미 그것은 본래의 도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P558)

정언명법 : 내가 그것을 행해서 손해가 나든 이익이 나든 반드시 도덕적 준칙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P575)

위정자들에게 좋은 정책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정치철학입니다. ~~~ 대중을 향해 아래를 쳐다보면서 그들의 의식을 깨우쳐 주고 대화하고 함께 손을 잡고 아래로부터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 진정한 정치철학인 겁니다. (P639)

조화라는 개념이 정의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라는 것은 곧 정의란 여럿이 서로 어울리는 것을 뜻한다는 말입니다. (P642)

이렇게 우리가 행하는 많은 논쟁들이 사실상 초점이 정확히 맞는 논쟁이 아니라 개념적인 이해의 지평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들이죠. 개념의 정확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P653)

그리스 사람들에게 정의라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조화예요. ~~~ 우주의 질서, 대자연의 섭리, 세계의 아름다움, 즉 '코스모스'에 대한 경탄이 늘 있어 왔고, 그래서 우주의 조화를 정의로 보는 생각이 미약하게나마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 휘브리스는 광기, 오만, 맹목, 일탈, 지나침 등을 뜻합니다. (P671)

인간은 말하자면 3층집과 같은 존재입니다. 가장 아래층에는 생물학적 삶이 있죠.~~~ 2층에는 사회적-역사적 삶이 있습니다. ~~~ 가장 위 3층에는 문화와 창조의 영역이 있죠. 시를 쓰고, 철학 공부를 하고, 조각을 하고, 과학적 연구를 하면서 삽니다. (P690)

현대 사유는 플라톤 전통과는 반대로 내재성에 입각해 세계를 봅니다. ~~~ 첫째 초월적 원리를 상정하기보다는 내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둘쨰, 영원한 법칙성이 따로 있고 생성은 불완전한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생성의 무죄를 강조합니다. 셋째 우주는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 우발성, 우연, 진화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죠. 니체 이후 오늘날의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현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반플라톤적입니다. (P699)

모양의 변화만 염두에 둘때는 형상(形狀)이 바뀐 것이지만, 기능이라든가 더 심층적인 것들까지 염두에 둔다면 형상(形相)이 바뀐 것입니다. (P702)